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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토리

보호받아야 할 성(性)

by 별동별 2020. 3. 7.

부모들은 비록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자식만큼은 아무 탈없이 인생을 살아주기를 바란다. 사랑을 하더라도 상처를 입지 않고 무사히 결혼까지 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차라리 섹스는 모르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성을 억압하거나 감추기에만 급급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꺼려왔다. 

성적인 문제에 관한 한 부모들은 자식에게 매우 엄격하다. 혹시라도 섹스를 해서 상처를 입게 되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성과의 성 관계를 알게 되더라도 부모와의 믿음을 저버렸다고 화부터 낸다. 그래서 자식들은 섹스를 두려워하게 되거나 이성과의 성 관계를 숨기게 된다. 

성을 억압하고 감추려고만 하는 것은 화초에 벌레가 생길까봐 아예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는 뭐든지 희생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성 문제만큼은 안이하게 해결하려고 한다. 화초는 살아있을 때만 그 가치가 있다. 살아있는 화초에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끊임없는 관심과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정말 화초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귀찮다고 무책임하게 뽑아버려 죽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성욕은 식욕과 같아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한다고 식욕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성욕을 억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리하게 성욕을 해결하려다보면 성이 타락하거나 기형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섹스를 모르는 상태에서 성적인 문제와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된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한다면 제대로 성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성과의 사랑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서 그 일이 인생의 값진 경험이 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 대·소변 가리는 일을 부모로부터 배운다. 하지만 사정을 한다는 면에서 똑같은 배설행위인데도 섹스만큼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성적 충동을 느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참아야 하고 또 섹스를 해서 성욕을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른다. 그저 본능이란 것에 맡겨만 놓고 당장은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본능이 도덕일 수는 없다. 본능에 의한 섹스는 발정을 하면 삽입하고 사정을 하면 끝나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섹스를 단순히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동물적인 행위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런데도 성욕을 억제하면 도덕적이고 그렇지 못하면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본능적인 섹스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성적 타락을 가져오게 된다.

인간에게는 도덕적 가치관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합리적으로 바뀌면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섹스도 단순히 종족번식을 위한 배설행위가 아님을 명백히 해왔다. 섹스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상대가 있다. 여자는 음(陰)으로 남자는 양(陽)으로 설명하면서 그 조화를 강조했다. 음과 양은 어느 한쪽이 강하거나 모자라도 안 된다. 남자와 여자가 대등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존중할 때 만들어진다.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알지 못하게 하고 가르쳐주지도 않는다면 은밀하게 관계를 맺게 되고 그렇게 관계를 맺다보면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둘 중 하나가 '이용을 당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제 자식은 자신의 성욕을 다루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부모라 해도 가르치는 일만큼은 자신이 아닌 학교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주기를 바란다. 차마 부모가 자식에게 섹스를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성행위나 성적 쾌락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자식들에게 섹스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과 같다. 섹스의 행위는 바로 나와 또 다른 내가 하나가 되기 위해 치르는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성욕만을 해결하려고 무책임하게 또 다른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는데서 문제가 생긴다. 섹스를 하기 전에 상대가 또 다른 나인지를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진정한 또 다른 나를 만나면 그것은 자석과도 같아서 서로를 끌어당기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인연(因緣)'이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인간의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대신하는 일이 섹스이다. 이런 성스러운 일을 하면서 왜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구약에 의하면 인간이 해산의 고통을 당하는 것도 원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섹스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섹스는 감추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떳떳하게 드러내어 어떻게 하는 것이 섹스를 잘 하는 것인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섹스를 드러내면 성적 상상을 하게 되어 오히려 성적 충동으로 인해 문제가 더 생길 거라고 말한다. 마치 섹스를 드러낸다는 것이 공공장소에서 포르노를 상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성욕을 억제하려는 생각에 성행위로 인한 문제점만을 강조해 왔다. 원치 않은 임신이나 성병같은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다보니 일단 '섹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부정적인 것들뿐이다. 그런데 섹스를 생활의 일부로 인정하고 알려고 하면 피임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만족한 섹스를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무분별한 섹스로 인해 성병에 걸릴 위험도 없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평생을 함께 할 상대를 찾기 위한 것이다. 비록 섹스를 했다해도 상대가 또 다른 내가 아닌 것이 확인되면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낫다. 섹스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이지 서로를 구속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랑을 확인하고 평생을 함께 할 상대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미적미적 시간만 끌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사랑해야 한다. 자기의 사랑을 상대의 몸이 느끼게 해주는 것이 섹스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쳐도 그 사랑을 상대의 몸이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몸으로 사랑을 느끼면 사랑의 존재가 확실해지고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섹스를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식의 성적 발달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나이에 맞는 적절한 성교육을 해주어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남이 하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섹스의 교육이 자신을 존중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인격 교육이 되어야 한다. 

섹스는 감추어서 방치되면 안되고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섹스로부터 자식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한쪽은 가해자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인 것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며 섹스를 할 수 있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이 결혼을 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서로 성적인 만족을 얻으면서 사랑하며 살 수 있게는 도와주어야 한다. 자식이 섹스를 몰라서 평생 불행하게 사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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